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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회 개인전 서문

2022. 12. 23 – 2023. 01. 20

본질의 태도

 손문일 작가의 작업은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의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는 그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감각을 배제하는 작업부터 시작하였다. 대상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주관적으로 덧씌워진 것들의 해방에서 온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대상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대상의 질감을 그대로 차용함으로 손문일 작가만의 시각 언어를 보여주게 되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객관적 실체를 찾기 위한 여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자신의 작업으로 증명해 보이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인간은 저마다의 삶에 대한 주관과 기준이 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상대적이다. 경제적으로 궁핍해도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보다 나으며 사람과의 관계로 인해 상처받아도 전쟁의 한복판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처한 사람보다 낫다.  인간은 비교우위를 통해 삶의 위안을 갖는다. 그래서 우리는 삶을 저울질할 잣대를 기준 삼아 살아가므로 대상을 본 대로 보지 못하고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본질을 표현하지 못한다. 손문일 작가는 그러한 삶의 모순을 인식하기 위해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점, 선, 면과 같은 개념을 작업에 상정하여 세계의 실체를 보기 위한 장치로 사용하였다. 

 이번 손문일 작가의 신작은 대상의 실체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묻는다. 그는 삶이란 세상을 받아들이는 기준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며 걷던 길이 절벽으로 향할 때, 도식화된 예술이 우리를 나태하게 만들 때, 무엇이 인간을 인간 답게 만들까? 를 고민하지 않을 때를 경계한다. 

 이렇게 작가는 수년간 표현할 대상의 본질을 드러내려 애쓰고 세계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그의 작품은 작가와 대상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서 도출된 실체이다. 이번 손문일 작가의 전시에서 본질을 직시하기 위한 삶의 태도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Q1. 신작에 대한 간단한 소개

이번 신작은 평면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와 예술의 목적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관객에게 있어서 예술이란 경제적 가치인 재화거나 시각적 환기를 통한 휴식이나 치유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에게 있어서는 직업적 생계이거나 혹은 취미 이거나 혹은 자아 실현의 도구로서도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예술은 수용자의 기준에 따라 바뀌지만 예술의 본질이 기준에 따라 바뀐다면 우리가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의구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번 신작은 우리가 예술을 바라볼 때 어떻게 바라 보아야 하는가? 에 대한 질문입니다.

 

Q2. 전시 제목인 전시의 태도를 작품에 어떻게 투영하였나요?

작가의 생각을 상징과 은유로 구성된 작품을 통해 전달하는 것은 항상 어려운 문제입니다.

메시지 전달에 중심을 두면 시각 매체의 작동 원리를 등한시 하게 되어 관객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심미적 감성에만 초점을 두면 숨겨져 있는 작가의 내면을 탐닉하기 어려워 진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적절히 분배하는 행위가 제가 바라는 작업의 태도이며 이번 전시의 중요한 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6회 개인전 전시 서문

손문일의 회화적 언어-게임, 느껴지고 알게 되는 그 어디쯤

 

이건수 미술비평

 

 현대미술의 주류는 아직도 20세기 중후반부터 위세를 펼친 팝아트와 개념미술의 영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미술의 헤게모니를 미국이 쥐게 되고 미국 중심의 미술 생태계는 여전히 위력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런 서구 중심의 패러다임의 전개 속에서 동양화라고 하는 울타리 안에 그 기원을 삼는 예술들은 어떤 방법론으로 자신의 정체성도 지키면서 보편적인 시대의 공감을 획득할 수 있을까가 여전히 관심사로 남아 있다.

손문일은 소위 한국화 출신이면서도 오래 전부터 전해져 온 고답적 정서나 방법론에 기대지 않고 동시대적 감성을 담으면서 한국화의 재료적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해 온 보기 드문 작가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강하게 느껴지는 팝아트적 색채와 개념미술적 구조는 우리시대의 동양화를 또 다른 차원에 위치하게 만드는 중요한 도전적 요소라 할 수 있겠다.

 우선 지필묵의 사용 없이 알루미늄으로 형상을 컷팅하고 그 위에 그 형상의 의미를 더욱더 풍부하게 만들어줄 소재의 천으로 감싼다. 그리고 극도의 평면적인 형상을 입체화하는 묘사 작업을 추가함으로써 평면과 입체, 현실과 가상, 형상과 이미지, 물질과 정신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쾌한 비쥬얼의 유희를 보여준다. 미시적인 바탕의 디테일(패턴-무늬)과 치열하고 철저한 묘사의 정확함은 모든 것이 제거된 흰 벽의 공간 위에서 부유하면서 무중력의 허구적 공간, 초감각적이고 비현실적인 상황과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꿈과 현실의 넘나듦과 정지를 알려주는 신호등, 혹은 네온사인처럼 우리의 시선과 인식 앞에서 점멸한다. 여기는 가상적 현실인가. 현실적 가상인가.

 양복과 드레스를 입은 익명의 군상은 기둥을 연상시키는 기하학적 조형의 머리를 두고 우리 앞으로 걸어 나오고 있다. 그것은 상투적인 윤곽선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끝없이 움직이고 있는 생명체이다. 마치 머리 없는 부처상이나 그리스의 토르소 조각상의 존재하지 않는 얼굴과 팔이 더 많은 표정와 제스처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고전적 우아함의 상징이자 기호로서 목소리를 내며 적막한 공간에 생기를 부여한다.

앤디 워홀의 독립적인 실크스크린 이미지―벨벳언더그라운드의 앨범 표지에 등장하는 바나나 같은―의 강렬함,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단순한 윤곽선과 율동하는 붓의 흐름―1965~66년 이후 등장하는 <브러시 스트로크> 연작과 같은―을 연상시키는 손문일의 팝적인 아이콘들은 셰이프트 캔버스의 해방감을 드러내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진지한 분위기와 색채를 지니고 있다.

 마치 거대한 수직의 일필일획으로 느껴지는 인물상도 그렇지만, 특히나 그의 <리본> 연작은 ‘놓여있고, 쌓여있고, 묶여있으면서’ 수묵화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운필감과 함께 수묵의 재료적 특성이 어떻게 표현상으로 진화될 수 있을지 보여준다. 리본의 엮어진 형상들은 물(水)의 유동성과 붓의 유연성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드러내며, 붓의 궤적과 흔적으로 남은 기운생동, 골법용필이라는 동양화 화법의 가장 중요한 필묵의 운용을 보여준다.

외면적으론 서양의 팝적인 외형으로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동양의 수묵 정신을 바탕에 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상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자세에서의 동서양적 차이 또는 신기한 일치를 혼성적인 기법과 재료로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동양화의 구습에 매몰된 채 동양화의 존재 가치를 주장하고 그 위상을 보호하려는 견해가 아니다. 동양화의 화면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발묵이나 파묵의 표현적 효과와 형식이 동양화만의 특수성으로 남을 수 없으며 그것이 오히려 동양화의 가능성을 옥죄는 한계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 손문일은 그런 수묵화 고유의 표현법이 보편적이고 현대적인 회화 언어로 승화되어야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우리시대의 진정한 수묵이란 재료와 화법을 떠나 동시대적 세계관을 담지하고 그 사상적 지평을 확장시키는 열린 개념의 그림이 되어야함을 그는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검은 먹물로 그린 앤디 워홀의 캠벨수프 캔에서, 거대한 붓질의 중첩과 운동으로 춤추는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붓자국과 굽이치는 금발의 웨이브에서 검은 먹의 심오함과 자연스런 물의 흐름을 더욱 깊이 공감하고 체감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동서양 회화의 발생적 기원과 전개를 초월한 회화의 근원적 목적, 즉 기운생동의 정신적 발현의 힘이다. 아무리 표피성을 강조하는 팝아트에서조차 이처럼 회화의 정신성은 본질적으로 존재한다.

수묵화의 본질적인 의도가 사생(寫生)보다는 사의(寫意)에 있었다는 사실은 시각주의라는 감각주의의 극단과 완성을 추구하다 한계에 도달했던 서구 미술사에 많은 레퍼런스를 던져준다. 생각과 뜻을 그리겠다는 사의적 태도는 아이디어와 콘셉트가 물질적 이미지의 생산 보다 더 중요하고 본질적이라고 본 개념미술의 탈육신화와 다르지 않다.

 손문일의 최근작은 이런 개념적 설치, 달리 말해 관계의 조응과 구성을 통해 사물과 언어, 그리고 그 의미의 관계 구조를 모색하는 과정으로 넘어서고 있다. 이전의 작업이 개체적인 이미지의 배열과 단일한 언어의 표현이었다면 최근작은 이런 개체들을 극적인 미장센으로 설정 편집하여 스토리텔링과 내러티브가 개입되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기를 말하기의 차원으로, 이미지를 랭귀지의 형식으로 인터렉티브한 환경 속에 전환하고자 하는 것이다.

애초부터 손문일의 인간상-오브제들은 마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정사>, <밤>, <일식> 등과 같은 고독한 영화들의 미장센처럼 허무, 고독, 단절, 소외, 미혹, 미완의 뉘앙스를 품고 있었다. 조르조 데 키리코의 황량하고 기묘한 광장-무대공간의 정적은 손문일이 만든 시공간에서도 유효하게 흐르고 있었다. 손문일의 나레이션은 여백이라는 동양화의 몰감각적 공간감을 통해서 극대화되었다.

연출된 셰이프트 캔버스의 적절한 거리두기·관계맺기는 화이트큐브의 닫힌 공간을 무한한 깊이의 열린 공간으로 만든다. 과감한 생략과 삭제로 육적인 눈이 아닌 정신의 눈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동양회화의 여백의 역학, 주변 배경들과의 일시적 단절을 통해 영원한 자유를 획득하는 존재의 의미를 다시 보게 만드는 여백의 패러독스를 손문일은 실험적 공간 연출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결국 손문일은 팝아트적인 전략과 개념미술적인 논리의 혼용을 통해 감각과 인식,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유기적인 통일을 무표정하고 중성적인 여백의 공간 속에 구성해 놓는다. 느껴지는 지점과 알게 되는 지점 사이에는 그가 장치해 놓은, 자세히 들여다봐야 볼 수 있는 아주 사소하고 조용한 모티프들이 작동하고 있다. 이때 다른 차원의 문맥 속에서 일상적 조건의 사물과 신체에 가해지는 ‘낯설게하기’는 존재의 본질 보다 존재의 실존을 드러내고 목도하게 만든다. 부조리한 현재적 조건 안에서 그 형상들은 그냥 놓여져 있기를 거부하면서 조용히 내재적인 아우라를 쌓고, 자발적으로 생동하면서 시공간의 묶음을 욕망한다.

‘이것은 남자가 아니다. 이것은 여자가 아니다. 이것은 낙엽이 아니다.’ 손문일은 무엇을 그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들 사이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긴장을 통해 그 무엇이 다른 차원의 무엇으로 읽혀지기를 의도하고 있다. 관계(relationship)이라는 작업은 작가 본인-자화상에서 시작되어서 최후에는 타자-관객으로 이어지고 끝나는 여정이라고 그는 말한다. 존재의 이름-개념은 본래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관계에 의해서 정의되고 규정된다. (회화적) 언어의 의미는 본질적 특징이나 지시 대상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호들의 관계망을 통해 추출된다는 것이 언어-게임이론의 기본 개념이다. 손문일은 존재적 본질을 직관하기 위해서는 관계의 망 속에서 그것을 바라보기를 권한다.

 그의 전시는 수수께끼 같은 게임을 쉬지 않고 제시하면서 관객들의 참여를 유도한다. 그리지 않고 보여주고, 말하지 않고 알려주는 그 모순된 게임의 전개가 계속해서 궁금해진다.

5회 개인전 전시 리뷰

 

나의 작업은 알루미늄 패널을 인간과 같은 크기와 형태로 자르고 그 위에 직물을 붙여 작업의 바탕을 확보한 다음 그 위에 에어 브러쉬로 물감을 분사하여 이미지를 구현한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 과정은 대상을 최대한 충실히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려는 방법이다.

 

이러한 사실에 입각한 표현 방법의 시도는 이미 13세기 화가 “Giotto di Bondone”에서부터 시작 되었다. 그는 관습적으로 형상화된 교회의 재단화를 관찰에 근거한 사실적 표현으로 회화의 르네상스를 열어준 작가다. “Giotto”는 주어진 공간 안에서 사실적인 시점과 실제 존재하는 대상을 기본 바탕으로 하여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Giotto”의 작업 방식은 내가 추구하는 “더욱 실체에 가깝게 접근하려는 작업” 방식과도 일맥상통한다.

 

최근의 이러한 작업 방법이 나오기 전에는 극사실 위주의 작업을 주로 하였다. 극사실화야 말로 “대상의 있는 그대로를 관객에게 드러낼 수 있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극사실주의 작업이 대상의 색, 질감, 형태 등을 물감을 통하여 표현하였다면 나는 이에 더 나아가 물감 대신에 대상의 구성요소를 직접 차용함으로써 더 실체에 가깝게 대상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실체에 대한 집착은 물질이 갖는 가능성이 작업의 중심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에 따라 물질을 바라보는 관점으로서 잉태된 나의 작품은 형태와 질감 그리고 그림자 기법 같은 요소들과 합쳐져 어떠한 에너지를 발산하게 된다. 결과적으로는 작품에 쓰인 물질은 작품이 가지는 관념까지 엿볼 수 있음을 시사하고 이러한 물질을 바라보는 관점이 작품 개념의 시작이면서 연속성을 이어주는 에너지이다.

 

또한, 인체의 상반신 특히 얼굴 부분을 도형으로 단순하게 처리한 것은 관객이 작품에 사용된 표현방식을 중심으로 작품을 감상하게 하는 장치다. 얼굴은 눈 코 입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기관들은 이미지적으로 희, 노, 애, 락의 에너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내가 추구하는 관점에 맞춰 작품을 감상하기에는 방해가 된다.

이러한 방해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어떠한 의미를 이끌어내기에는 힘든 가장 단순한 형태의 선적인 혹은 면적인 요소로 작품의 상반신 부분을 대처하였고 작품의 실체에 근접하려는 의도를 극대화하였다, 사실적으로 표현된 양복과 구체화하지 않은 익명의 군상은 대조적인 느낌과 함께 시각적 다양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작업물은 관객의 경험적 기억 안에서 재해석 된다. 작품의 소재가 되는 양복과 드레스는 현대 사회와 의복이라는 신분성, 기하학적인 가면으로 인한 익명성, 즉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단면을 지시하고 있다.

 

나는 아직 현실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주변에 존재하는 본질의 다양한 측면을 작품을 통해 가시화 해보고자 한다. 나는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매개체로서 사실적인 표현만으로 나의 역할을 제한하거나 작품의 재료로써 대상의 구성 요소를 직접 차용하여 확장했던 것처럼 나는 내가 구축한 세계를 형성시킴과 동시에 그 영역을 넓혀가며 점차 작업을 구체화하였다. 나는 이러한 확장과 수축의 반복을 통한 작업 진화의 과정이 본질에 다가가려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4회 개인전 전시 리뷰

물질의 언어 Material Language

손문일의 작업 과정을 들여다보면 플랫한 알미늄 패널을 인간 신장과 같은 사이즈로 컷팅을 하고 그 위에 균일하게 패브릭을 고정하여 평면을 확보한다. 남성의 경우 줄무늬 양복지가 주는 강인함, 여성의 경우는 핑크나 연두와 같은 파스텔 색상의 실크 감촉의 천들로 일차적인 작업 이미지를 구현할 구조를 갖추게 된다. 물론 아무 것도 재현되지 않은 평면화된 구조 속에 작품을 구성할 윤곽만으로도 이미지를 유추할 수 있기에 충분하지만 평면화된 화면 위에 재현될 이미지가 대상의 본질을 일반화하는 것은 짐작해 내기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에어브러쉬에 의해 붓으로서 구현한 형태가 아닌 모호한 경계면의 분사를 통해 음영을 재현한다. 섬세하고 밀도 있는 색들의 도포를 통해 작품은 실재화도 같은 환영의 이미지를 구현한다. 이런 구체적인 이미지를 재현하기 위한 최상의 재료들이 곧 작품의 본질과 연결되어 있다.또 본질에 대한 집착은 선택된 물질이 갖는 가능성이 작업 속에 내재되어 있음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물질을 다루는 자세가 작품의 개념이고 작업의 연속성을 이어주는 무한한 동력원이 된다. 또한 물질이 작품의 관념까지 내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쉽게 풀이하자면 재현된 불특정한 인간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평면적인 양복지 위에 이미지를 구현하는 자체가 작품이 품고 있는 개념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비유로 거친 돌멩이 위에 이미지를 구현하는 것과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는 실크 위에 드레스의 이미지가 구현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드레스의 본질을 거친 돌 표면에서 유추해 내기란 쉽지 않은 발상이다.
 

대상의 본질적 특성을 파악하고 가장 적절한 본질로 해석될 수 있는 물질에 이양된 것이다. 재현의 기술적 측면이 물질과 결합하여 본질을 극대화한다. 대상을 응시하고 재현을 통해 물질의 본성을 일반화 하고 있다. 이는 세계의 근본이 되는 실재를 정신이나 관념이 아닌 의식의 외부세계와 독립할 수 있는 물질의 작용을 이해는 유물론과도 일맥상통할 수 있는 부분이다. 대상에 대한 적절한 세계에 대한 이해는 물질의 고유한 능력을 잘 해석하고 관념적 유기성을 벗어나 해석의 대상이 아닌 존재하는 물질 자체에 대한 집착적인 성향도 보여진다. 그러나 물질의 속성을 표면화 하는 과정은 최종적인 형태를 결정하고 재현된 이미지가 확장적인 본질을 표현하는 동시에 본질을 드러낸다.
 

물질, 곧 재료의 언어를 통해 이미지들은 대상의 본질적인 개념을 여과 없이 담백하게 드러낸다.
 

1980년생으로 젊은 작가 손문일은 고민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해 내는 일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고전주의적 시각에서 대상을 재현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닌 재현된 이미지 속에 대상의 본질을 담아내려 하고 있다. 사실적으로 묘사된 인체의 표현과 대조적으로 구체화되지 못한 익명의 얼굴들은 우리의 초상이고 우리 사회의 단면이다. 잘 차려입은 자에게 우리는 사회적 지도층의 아이콘을 부여한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윤리적 판단과 폭력성조차 알 수 없음에도 사회적 합일을 부여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익명성에 갇혀 있다면 그들이 강제하는 사회적 위력은 통제력을 상실 할 수도 있다. 통제될 수 있는 본질로 통하기를 바란다. 조합된 이미지를 통해 종교적인 대상으로 이양되기를 바란다. 예술가로서 개인의 본질을 대상화하는 차원을 넘어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차원까지 확장되기를 바라고 있다.
 

앞으로 다가올 날들이 더 많을 젊은 작가의 작업 앞에서 물질이 자아내는 본질에 대한 엄숙하고도 진지한 고민을 같이 나눌 수 있는 계기가 될 듯하다.

 

갤러리폼 디렉터 김경선

​2회 개인전 평론

본질과 유희하다

 

손문일의 작업은 본질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한다. 사물의 근원 혹은 본질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미술가들에게 새로운 주제가 아니다. 본질주의라는 이름으로 이데아를 쫓고 그것을 닮아가려고 했던 그리스 시대의 미술 이래, 형상을 닮고 본질을 찾으려는 시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미술의 역사에서 늘 있어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손문일도 과거에 수없이 많은 재현을 시도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실 재현이란 그 결과물이 실제와 유사한가의 여부를 떠나 어떠한 사물이나 관념을 작가의 프리즘을 통해 제시하는 것이다. 손문일은 재현이라는 것 자체가 작가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임을 스스로 분명히 인지하고 있으며 작가가 대상과 작품 사이의 매개체로서 작용하는 것을 작업의 중요한 요소로 삼아 왔다. 그는 작업 초기,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작가의 역할을 최소화하여 대상의 실재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에 집중하기도 했으나 점차 변화를 시도함과 동시에 매개체로서 역할을 강화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나갔다.


 손문일이 처음 주목한 것은 자신의 주변, 혹은 작업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탁자, 의자, 정물 테이블의 천 등의 사물들이었다. 당시 본질에 대한 그의 관심은 모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는데 2010년 첫 번째 개인전에서 선보인 다양한 형태의 책상에서 보듯, 그는 대상을 각도에 맞춰서 자르고 무늬목을 입힌 뒤 음영을 칠하는 방법을 사용해 입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평면인, 재현이 가진 환영의 속성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손문일은 작업을 거듭하면서 본질의 표현에 대해 고민하고 대상을 나타내는 다양한 방법을 연구하는데 그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일부, 예를 들어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이나 사물을 덮고 있는 천의 다양한 질감 혹은 직물의 짜임도 대상의 본질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두 번째 개인전인 이번 공아트 스페이스의 전시 작품 대부분은 옷이나 천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들은 옷의 질감이나 천의 속성이 도드라지는 등 소재의 전형성을 보여준다. 손문일은 양복의 거친 질감, 부드러운 천의 흘러내림, 사물을 감싼 천의 팽팽한 느낌, 얇은 천의 겹쳐짐, 천이 형성하는 다양한 주름 등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았거나 예상 가능한 대상의 본질적 특징을 다양하게 나타낸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제시하는 이미지 전체는 재현이라고 명명할 수 없는 특징을 지니는데 <준비 1>에서 검정색 양복을 입은 사람은 손과 발이 있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으며 그 자리가 비정상적으로 늘어져 있거나 <관계 2>에서 처럼 상반신 전체에 인물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원기둥의 기하학적 형태가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또한 그리스 여신이 입을듯한 파란색 드레스의 여성을 그린 <관계 3>에서는 얼굴은 사라지고 상체와 얼굴을 연결하는 부분에 십각형의 입방체가 있다. <관계 4>의 올리브 색 옷을 입은 사람은 치마자락을 살짝 올리고 있고 그 안에서 신체를 연상할 수 있는 부분은 보이지 않으며 허리부터 머리까지 원기둥으로 이어진다. <덮다> 연작에서 탁자는 덮은 천의 실루엣으로 그 형체를 파악할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지, 형태가 어떠한지, 탁자 위에 무엇을 놓고 천을 덮었는지 등의 세부적인 모습은 확인할 방법이 없다.

 

때문에 재현 혹은 사물의 본질적인 속성을 드러내는 듯 하면서 이들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게 하는 손문일의 작품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을 과감히 해체하고 낯선 이미지를 조합함으로서 일반적 재현으로부터 멀어진다. 심지어 초록색 천으로 팽팽히 감싸져 있는 물체를 표현한 <감다 2>는 원래 작업실에서 사용되는 단순한 도구이지만 작가는 그 원형이 무엇인지 상상할 수 조차 없게 만들고 부드러운 질감의 천이 겹쳐져 쌓여있는 <쌓다> 연작 또한 재현과의 거리감을 더욱 확보하게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대상과 작품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작용하는 작가의 역할을 제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대상을 재현하고 그것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소재가 되는 사물의 다양한 형상들을 분리하거나 규소와 같은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원소의 기하학적 결정체와 결합시켜 작가의 역할을 부각시킨다. 작가는 감추고 있었던 자신을 서서히 드러내 보임과 동시에 작품의 소재인 사물들은 천에 가려지거나 왜곡되는 등 외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그 특징이 자연스럽게 은폐되어 결과적으로 대상이 가진 본래의 의미 혹은 본질은 상실하게 된다.

 

작가가 선택한 사물들은 새로운 이미지를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희생한다. 책상이나 테이블, 천은 그의 작품에서 하나의 도구로 사용될 뿐이며 반면에 새롭게 생성된 이미지들은 개별성을 부여받고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손문일의 작품에서 생성-소멸-변화를 반복하는 이미지들의 생존법칙은 마치 약육강식의 생태계적 법칙과 유사하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위해 우선 주변의 사물을 선택한다. 이 후 선택한 사물과 관련된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원래의 사물은 이 생태계의 절대 강자인 작가에 의해 소멸되거나 변형되며 자신의 일부를 희생한다. 이 순환과정에서 생존한 이미지들만이 그의 작품에 존재할 뿐이다. 이를 위해 작가가 사용하는 방법은 직관적 감각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단지 그의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우연히 혹은 무의식적으로 선택, 변형되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이 그리는 소재나 이미지를 선택한 분명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짙은 회색의 양복에 얼굴을 표현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는 표정이 드러날 경우 시각적 균형이 깨진다는 답변을 내놓는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손과 발이 없고 상체가 원통형으로 구성된 사람처럼 조화로우나 조화롭지 않으며 규칙적이지만 불규칙적인 특징을 지닌다.

 

손문일이 제시하는 이미지들은 그의 생태계에서 생성된 새로운 개체이기 때문에 사전적 정의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이미지’ 라는 태생적 한계가 그 어떠한 규정도 거부한다. 따라서 작품을 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에 대한 직관적이며 감각적인 반응뿐이다.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옷을 입은 사람은 누구인지, 테이블을 덮은 천 속에 어떤 물체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보다 총체적 이미지가 발현하는 감성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보는 사람은 이 기묘한 이미지들로부터 어떤 감정이나 감각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데 그것은 구체화되지 않으며 하나의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얼굴이 없고 어깨가 비정상적으로 위로 솟구쳐 올라간 작품을 보고 ‘그로테스크 하다’ 라는 표현으로는 마무리 할 수는 없고, 부드러운 소재의 붉은색 천이 쌓여있는 이미지를 ‘모호함’ 이라고만 단정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직관적으로 선택된 은폐된 형상들과 주름 잡힌 천 조각은 새로운 생명을 부여 받아 꿈틀거리고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시각뿐만이 아니라 청각, 촉각이 결합한 언어를 발화하게 되며 이 낯선 이미지들이 뿜어내는 에너지에 동참하게 된다. 어떤 물질적 형상으로도 귀결되지 않는 <쌓다> 연작에서 마침내 이 에너지는 폭발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미지들의 본질 그 자체인 것이다.


본질을 표현하길 원했던 젊은 예술가의 열정은 이미지를 창출해 스스로 본질을 생성하게 된다. 그리고 본질을 찾아 재현을 고민하던 작가는 이제 더 이상 물질적 대상과 작품 사이의 매개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둘 사이를 넘나들고 유희하며 자신의 역할을 자유롭게 확장하고 있다. 이제 손문일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그리느냐가 아니라 창출한 이미지로부터 무엇을 느끼느냐이다. 왜냐하면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사물들은 작가에 의해 새로운 생명을 부여 받았고 여기서 과거의 본질을 찾으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천에 뒤덮인 사물이 탁자임을 인지하여도 작품에서 인체의 일부분을 발견하여도 이들은 작품의 이해를 위한 단서를 스스로 제공하지 않는다. 규칙과 불규칙을 넘나들며 이미지를 생성, 변화시키는 손문일의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규정할 수 없는 감각과 언어를 발산하게 하며 본질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미지에서 발생하는 에너지가 하나로 귀결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애매모호하고 종잡을 수 없는 느낌을 유발시키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이미지가 가진 힘이다. 새로운 이미지들이 쌓이면 이들은 작가가 선택하지 않은 과거의 사물들처럼 버려지고 변형될 것이며 이런 과정에서 새로운 이미지가 형성될 것이다. 그의 작품은 마치 세포분열을 하듯 증식하며 확장되고 있다. 따라서 각각의 세포를 아는 것 보다 작가가 형성한 생태계의 특징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반전이 있다면 손문일의 작품들은 3차원인 듯이 보이지만 여전히 2차원의 평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작가는 스스로 조작한 이미지를 보거나 실재로 그 형상을 만든 후 그리는 과정을 통해 작품을 완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재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듯 하나 과정상에서 재현의 방법을 사용하며 결과적으로 환영의 속성을 드라마틱하게 드러낸다. 또한 그는 소재로 선택한 사물의 본질을 버린 듯 하나 어느 순간 본질 자체를 적나라하게 제시하기도 한다. <준비>, <관계> 연작들에서 양복이나 드레스를 입은 인물들과 결합한 기하학적 도형은 모두 본질적인 측면과 관련이 있는데, 예를 들어 <관계 1>에서 양복 입은 사람과 결합한 도형은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 중 하나인 규소 결정체이며 <준비 2>에서 핑크색 드레스의 상단은 그림의 그리는 행위의 가장 기본인 붓질로 이루어져 있다. 나머지 작품에서 옷을 입은 인물과 결합한 것은 기본적인 입체도형이다. 손문일 자신의 관심사이자 작업의 출발점인 본질은 변형-재생산의 과정에서 멈추지 않고 의외의 곳에서 다시 드러나는 방법으로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본질’ 이라는 거대한 주제에 대해 자신이 그 세계를 바라보면서도 집착하지 않고, 고민하면서도 고통스러워하지 않으며 본질과 유희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때문에 우리는 실제로 납작한 평면에 불과하지만 입체임을 확신하게 만드는 환영의 눈속임, 원소 결정체와 같은 기하학적 도형을 과감하게 사용하는 본질에 대한 작가의 유희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손문일은 보이는 현상 너머의 차원을 응시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본질의 실체이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본질의 세계를 탐구하며 이를 작품을 통해 제시한다. 손문일의 작품들은 진화한다.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매개체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제한하거나 확장시켰던 것처럼 그는 자신이 구축한 생태계의 개체를 확장시킴과 동시에 작업세계는 그 영역을 좁혀가며 점차 구체화 된다. 확장과 수축을 반복하는 진화의 과정에는 본질에 대한 유희가 있다. 유희란 본래 두려움이 없어야 가능한 것이다. 본질에 대한 순수하면서도 거침 없는 접근 그리고 대상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치밀함이 본질이라는 주제를 탐구하는 손문일의 힘이다.

최지아/예술학

 

Son Mun Il's work begins from the search for the essence. Exertion to reach the root, the essentials of the objects is not a new topic for the artists. With the influence from the essentialism of the Roman era that chased 'Idea', the endeavor to seek for the basis and to take after the forms has always existed in both western and eastern history of art. In this context, it is needless to say that Son Mun Il had endless attempts of reproduction. Reproduction does not mean the exact re-creation of the objects or the ideas but it is more like the re-interpretation of the objects and the ideas created by the artist's unique point of view, the artistic prism. Son clearly perceives that representation is the process of revealing the artist himself and the he emphasizes his role as the medium between the artwork and the objects. In his early works, the artist minimized his role in order to show the essence, however gradually changed through process, to strengthen his role and expanded his part as a medium.

 

What Son Mun Il had focused the most, in the beginning, is the objects that could easily be found in the ordinary scenes, things could be found in the surrounding areas such as tables and chairs. At the time, Son's interest on the 'Essence' was merely bigger than imitating as it can be seen from his first solo exhibition in 2010 of which the artist cuts the objects along its angles, then attaches the wood veneer then applying the paints using airbrush where it gave the artwork three dimensional look on the flat surface. However, Son's work, through practice and study on various ways to portray the essence of the objects, he finally realizes that the texture of the fabric could be a way to reveal the 'Essence'.

 

In his second solo exhibition at Gong Art Space, Son presented a series focusing on the texture of the fabric. Son Mun Il expressed the rough texture of the suit, the dropping of the soft fabric, and the clinging feeling and the layering of the thin fabrics, in various ways. What he portrays through this series cannot be considered to be the exact representation of the existing object where 'preparation1' and 'relationship2', the unrelated geometric shapes are presented.

 

What needs to be pointed out is that Son Mun Il does not limit his work only to be the medium between the objects and the artwork. In order to re-present and to express the essence, Son does not curtail himself but he stands himself out by separating the figures, or by adding the geometric shapes of the basic elements. For revealing the artist on the work, the objects partially lose their basic identity by being hidden behind the fabric and other distortions. But the objects willingly sacrifice themselves for the new image of the artwork.

 

Son Mun Il's work repeats the process of 'creation, extinction and the change'. This repetition resembles the law of the jungle, In order to create the desired image; Son first chooses the objects in the surroundings. Then he collects data on the chosen objects and goes through the editing process. Like the law of the jungle, only the stronger images survive. The reason for the artist to choose the images is very intuitive. The objects were chosen only because they existed in the surroundings. Son never clearly explains the particular reason for choosing the objects or the images. But Son states that the reason for the absence of the faces in the men in suits is because the facial expressions would break the visual balance.

 

The images that Son Mun Il presents is the newly created entity, it cannot be defined in certain way and it rejects any kind of regulation. Therefore, the viewers only can show the sensual, intuitive reactions. The viewers focus more on the image that the artwork gives, than focusing on what type of object it is or who the person wearing the suit is. And the viewers naturally draw sensual feelings, and they cannot be actualized nor defined in a word. 'Grotesque' cannot conclude the shape of the work without face and the abnormally portrayed shoulder, 'ambiguous' cannot define the image of the red silky textured object.

 

Intuitively selected covered images and the lined fabrics are granted with the new life and the viewers ignite the visual, auditory and sensual languages and contribute to the energy that the unfamiliar images spurt. The young artist's passion to create the image that reveals the 'Essence' finally creates an image that portrays his own 'essence'. And the artists who were seeking to express the essence exist not merely as a medium but now exist as one significant flexible existence.

 

The ambiguousness and the unpredictability is the strength that Son's works have. The chosen images go through the change process in order to have the new image and this is expanded like the cell division. One more interesting thing to be pointed out is that Son's work are done on flat surface but they portray the three dimensional images, and they are all intentionally created through modeling the actual object then painting on the top. Also, the objects seem to lose their essence but instead it frankly suggests. In 'relationship' and 'preparation' series, the mixture of the suit and dress with the geometric shapes are all related to the essence part, for example, the geometric shape from 'relationship 1' is silicon crystal which is one of the basic elements and the top of the 'preparation 2', there exist the brush which is the essence of the painting. This is the result of Son never limiting his work in representation, recreation but he penetrates the whole work. This proves that Son enjoys studying the topic 'Essence', rather than being obsessed or agonizing. Therefore the viewers, we can finally accept the artist's twist and play on mixing the geometric shapes with the objects.

 

Son Mun Il gazes the plane over the actual visualization. This is the noumenon of the essence. Son explores the area of substantial existence and he suggests through his work. Son Mun Il's work evolves. Genuine yet inexorable approach, elaborate observation on the object and the details are Son Mun Il's strength in exploring the 'Ess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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