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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에 대하여"

 

최초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 동굴벽화의 의미는 그 시대의 인류에게 있어서 생존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한 대상의 형태를 평면에 재현하는 긁적임은 시간이 흐르고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생존의 목적을 뛰어넘어 눈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인간개인의 존엄이 사회적 가치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 받은 시대에 포스트 모더니즘이 탄생하였다. 그 결과 현재는 개인의 작품행위에 대한 생각 방식을 근본부터 독자적으로 구축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그리하여 어떠한 대상을 표현함에 있어서 내가 어떻게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한 관점을 밝히는 것이 작업행위의 첫 번째 단계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여러 가지 관점 중에 나는 유물론적 관점 즉 실체가 가진 에너지에 중심을 두고 작업행위를 하였다. 그러한 작업행위를 하던 중 몇 가지 의문이 든 것이 있다. 유물론적 관념과 내가 진정 원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작품을 위한 작품과 나를 위한 작품 중에 어느 것에 중점을 두고 작업행위를 할지에 대한 선택문제이다. 그리하여 단테 Dante Alighieri 의 “행위자체가 가지는 자아의 현시”라는 명제를 바탕으로 하여 나를 위한 작품을 중심으로 작품행위를 시작하였다. 그러한 작품개념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재료기법을 연구 하였다. 그리하여 대상의 실제 사물을 표현재료로써 사용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작품행위의 결과물에서 몇 가지 의문점이 생겨났다. 그러한 의문은 작품에 대한 나의 끝임 없는 질문이다. 그 질문이라는 것은 의구심에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그러한 작품에 대한 의구심을 애초에 차단하기 위해 절대적 명제를 작품에 대입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러한 명제 같은 절대적 성향을 지닌 대상의 본질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또 다시 그러한 본질을 찾는 과정에서 몇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 그리고 시대성, 언어적 한계가 그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본질에 대한 비트켄 슈타인 Wittgenstein 의 관점을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이 가지는 내적 성향의 시각화를 통해 점, 선, 면 같은 기하학적 요소를 작품에 대입하게 되었다. 이러한 작품개념을 변증법적인 방법을 통하여 구축하면서 작품행위의 결과물인 작품이 가지는 결과론적 가치보다 작품행위 자체가 가지는 과정으로서의 가치가 더 작품다운 작품을 할 수 있게 해주는 핵심이라는 것을 작품활동을 통해 느끼게 되었다.

 

목 차

1. 어떠한 대상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들

2. 철학적 사고에 입각한 작업개념
2. 1. 관념론
2. 2. 유물론
2. 3. 유물론에 입각한 작품활동
2. 4. 유물론에 입각한 작품활동에 대한 의문과 나의 자의식

3 자의식에 입각한 작품활동
3. 1. 재료기법연구
3. 1.1. 프린트
3. 1. 2. 판화
3. 1. 3. 실크 스트린
3. 2. 현재의 작품방식

4. 작업행위가 작품개념에 부합되지 못하는 문제점
4. 1. 시각의 한계
4. 2. 대상과 작업 재료와의 불일치

5. 작업개념 구축 방식의 변화
5. 1. 변화의 세가지 이유
5. 1. 1. 인간의 오감
5. 1. 2. 시대성
5. 1. 3. 언어의 본질
5. 2.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재고.
5. 3. 인간의 내적 성향에 입각한 요소를 작품에 대입.

6. 작품행위 과정 중 “과정”개념의 중요성의 발견

 

무엇에 대하여

1. 어떠한 대상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들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명확하게 표현되어야 했던 시대는 지났다. 추상화에서 개념미술까지 대상에 대한 표현법이 다채로워진 현재, 어떠한 방식으로 대상을 표현할지 그리고 왜 그러한 표현방식을 선택 하였는지에 대한 구체적 이유를 밝히는 것은 당연하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먼저 작가가 무엇인가를 표현하기 위해서 그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바라 보아야 할까?
여기 내 앞에 붓 하나가 있다고 가정 해보자.
이 붓은 과연 무엇일까?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페인트칠을 할 때 쓰는 도구의 하나 일수도 있고 내가 여태껏 사용해온 나의 손길이 닿은 붓 일수도 있고, 누군가가 어제 이 붓과 완전히 똑같은 다른 붓과 바꿔 치기 해 놓을 수도 있는 붓일 수도 있고, 붓을 아주 작게 나누고 나누어 더 이상 분리할 수 없을 때 도출되는 어떠한 물질의 결합체 일 수도 있고, 나와 붓의 물질적 공통요소 즉, 붓의 원소와 나를 이룬 원소의 물질적 공통의 분모로 인한 나와의 물질(실물, 실체)적 공통성을 지닌 것 일 수도 있고, 어떠한 철학적 사유를 통한 사고의 고차원화로 갈 수 있는 에너지 혹은 어떠한 가능성을 내포한 붓이 될 수 도 있다.
위의 것들은 모두 붓을 바라보는 시점을 다양화해서 붓을 설명한 것들이다. 언뜻 여러 갈래의 관점들이 보여지지만 이러한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지는 듯하다.

 

2. 철학적 사고에 입각한 작업개념
2. 1. 관념론

첫째, 대상이 지니는 물질적 속성 혹은 내재적 의미는 관찰자인 나를 통해서 표현 되어진다는 극히 관념론 적인 관점이다.. 그럼으로 인해 대상은 전적으로 내가 가진 생각의 범위 안에서 해석 되어 진다. 이렇게 그 대상은 나의 생각과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경험한 것을 통해서만 해석될 수 있다. 베르그송 Henri Bergson 의 IMAGE 에서도 밝히듯 어떠한 대상을 표현할 때의 중점은 그 대상이 아니라 다분히 관찰자의 관점이다. 대상을 표현하려는 관찰자의 상태 혹은 생각과 태도에 따라 그 대상은 한 순간에 아무 의미 없는 것일 수도 아니면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렇듯 작품 그 자체가 지닌 요소들이 관객에게 전달하는 영향보다 작품에 내포된 작가의 내적 속성이 관객에게 더 큰 영향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수없이 많은 예술가들에 의하여 증명되었다.

 

2. 2. 유물론

둘째로는 관찰자가 그 대상의 본질을 밝히려는 관념적 혹은 철학적 사고의 시도 조차 그 대상이 지닌 실체 혹은 본질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관계적 연결고리는 실질적으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아니하며 단지 그 대상은 대상일 뿐 이라는 입장이다. 대상이 주는 이미지 즉 그 대상 자체를 우리가 완전히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눈 이라는 지각요소를 가지고 그 대상이 나에게 주는 이미지를 전달 받는 것이기 때문에 순수한 대상의 면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여태껏 형성된 의식수준의 수위에서 만큼만 인식이 가능하다. 라는 점이다. 그래서 대상은 대상일 뿐 더 나아가 관찰자가 그 대상을 관찰하고 파악하여 본질을 찾으려 시도하는 것 또한 의미가 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4. 유물론적 관점을 통한 작품 활동 2. 1. 3. 基于唯物论的作品

이렇듯 첫 번째 견해인 작가주의적 입장은 관념론에 가깝고 두 번째 견해인 실체에 대한 견해는 유물론 에 가깝다. 이렇게 서로 상반되는 견해에서 나는 유물론적 입장, 즉 실제가 지닌 본래적 에너지에 관심을 기울였다. 왜냐하면 주관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작가주의적 관점은 너무나도 가변적이고 개인적 이라서 이다. 어떠한 보편적 질서나 유기적 구조체 같은 정리된 사고체계를 추구하는 나로서는 대상의 실존, 즉 상대적으로 더 보편적일 수 있는 실존의 가치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싶었다. 그리하여 영감, 순간적 감성, 직관, 순간의 찰나 같은 작가 개인의 추상적 요소들 보다는 어떠한 기준에 의해 선택 되어진 요소들을 가지고 일률적 체계(예를 들어 분류, 해체, 합성)를 대입하여 여태껏 존재하지 않은 새로운 정신 작용을 이끌어 내는 행위가 되었으면 한다. 예를 들어 귀로 인지 할 수 있는 음파의 자극들, 불규칙한 소리 등에서 구체적으로 가락이나 리듬, 박자를 구성하고 체계화하여 음악이라는 결과물로 나타내는 데 필요한 일련의 구조적 체계 과정처럼 말이다.

 

5. 자의식의 구체화. 2. 2. 1. 对基于唯物论创作作品的疑问与自我意识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하던 중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관념론과 유물론, 두 가지의 관점 중에서 하나를 택한 나 자신의 주관성에 대한 것이다. 어떠한 개념이든 최종적으로 택한 선택의 근간은 나의 성향에 의거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선택의 기준은 나의 내적 성향에 의해 최종적으로 마무리 된다. 그러한 작품활동을 함에 있어서 이렇게 나의 성향에 따른 작품행위가 가장 올바른 길일까? 하는 의문이다. 그리하여 나의 성향보다는 작품에 중심을 두고 작품 행위를 하는 것과 내가 바라는 어떠한 행위가 작품이 되어진 것.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작품과정으로서 현명한 선택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한 물음에 대한 지표로 아래의 예문을 들어 계속 고민해보았다.

행위자가 모든 행위에서 우선적으로 의도하는 것은, 그가 자연적 필요에서 행위하든 자유의지에서 행위하든 상관없이 자기 이미지의 현시이다. 따라서 모든 행위자는 행위 하는 한, 행위 속에서 기쁨을 얻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의 존재를 원하고, 행위에서 행위자의 존재는 다소 강렬해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기쁨이 뒤따른다. 그러므로 자신의 잠재적 자아를 드러내 보이지 못하는 행위는 행위가 아니다. – 단테 Dante Alighieri

단테 Dante Alighieri 가 언급한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 작품활동이라고 가정하여 보자. 작업 행위가 앞서 말한 바 대로 나의 현시라면 작품을 위한 행위보다는 행위에서 자아를 드러낸 결과물이 더 작품다운 작품이라고 생각 되어진다. 그리하여 나의 행위가 단순한 나의 취향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작품활동(행위)에 있어서는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잠재적 자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작품 활동을 지속함으로서 자의식의 구체적 체계화를 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자의식을 더욱 정확하게 인지하여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5. 작품활동의 출발 2. 2. 2. 立足于自我意识的作品创作

그리하여 내가 대상을 바라보는 행위에 관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밝힐 수 있는 과정부터 작업의 출발선으로 삼았다. 표현할 대상의 형태, 색깔, 질감 같은 시각적 요소들과 나와 대상과의 관계, 의의, 같은 관념적 요소들, 이러한 대상의 여러 가지 요소들을 가지고 “표현한다” 하는 것은 나의 의식과 표현할 어떠한 대상과의 관계라고 생각하였다. 나의 의식과 표현할 대상 중 어느 것에 더 중점을 둘지에 대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작가(관찰자)에 비중을 더 많이 두어서 표현을 할지 아니면 표현할 대상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표현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작가에 비중을 더 많이 두고 표현을 한 추상화의 예를 들어 설명하여 보자. 표현할 대상의 형태를 보여지는 모습 그대로 관찰하여 그리는 기존 회화의 기능적 관념을 벗어 나면서부터 추상미술은 기하학적 요소인 점, 선, 면 같은 형이상학적 요소로만 가지고 화면을 구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재현에서 탈 재현으로의 평면 회화 작업들의 의의, 즉 추상화 이전의 작품들보다 화면의 구성과 구도에 더욱 충실하게끔 형태, 색깔, 질감 같은 그러한 요소들을 해체하여 배치를 한 추상화는 쉽게 말하자면 표현할 대상과 작가와의 관계에서 적극적으로 작가에 비중을 두고 표현한 작품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대상과 나와의 관계에서 추상 미술에서처럼 관찰자(작가)의 시점에 비중을 두고 표현하기보다는 대상에 비중을 두고 표현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내가 대상을 관찰하며 도출된 시각적 요소, 즉 형태, 색, 질감 등의 아주 사실적인 요소만을 선택하여 표현하는 것이 내가 그 대상의 본질 혹은 실존을 찾고자 노력하는 나의 첫 시도였고, 세상의 수많은 이미지(image) 속에서 나만이 가진 예술의 해석 방식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사람을 그릴지 사물을 그릴지 책상을 그릴지 시과를 그릴지에 대한 대상의 선택 기준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실재 눈 앞에 그대로 보여지는 대상의 가장 객관적인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 내가 추구로 하는 개념을 만족 시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극 사실주의의 한 맥락으로도 쉽게 설명 할 수 도 있다. 비록 극 사실주의의 사조적 발단은 팝 아트의 반동으로 인해 부각된 것이고, 감정의 배제라는 중심이 되는 관점이 존재 하지만 주변의 흔히 볼 수 있는 친숙한 대상을 가지고 객관적 시각 요소만을 관객에게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 관심을 유도하는 극 사실주의 방식은 내가 추구로 하는 표현 방식과도 비슷한 맥락이라고도 해석 될 수 있다.

좌 sonmunil, 우 untitle, 100x180cm, digital print on korea peper, 2004


위의 그림과 같이 실재의 대상을 촬영 한 후 컴퓨터 프린팅으로 장지(Korea paper)에 디지털 프린트를 하는 작업을 했었다. 그에 한동안 그러한 극 사실주의에 입각한 작업을 해오다가 옷의 질감을 촬영하게 되었는데 카메라의 특성상 초점이 모든 화면에 정확히 나오지 않는 문제가 생겨서 인쇄된 작품에 리터칭을 하여 옷의 질감 즉 옷의 구조적 짜임새를 그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기존의 작가들이 했던 방식과도 비슷하고 작업성 또한 좋지 않아서 다른 방식을 고수하게 되었다

부드러운 고무 혹은 지우개의 평평한 면에 음각으로 옷의 질감을 새겨서 종이위에 도장식으로 반복적으로 찍어서 옷의 질감을 표현하려 시도를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것의 문제점은 도장 면이 구조적 옷감의 짜임 느낌이 나오지 안고 단지 점 과 점이라는 분단된 시각으로 보여져서 이것 또한 적당한 작업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림 1장

위의 사진은 옷의 짜임을 근접 촬영한 필름을 컴퓨터로 더 자세히 수정한 후에 실크스크린 기법을 이용하여 제작된 실크판이다. 캠버스에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옷의 질감을 입 힌 후에 명암을 주어서 표현하려 하였으나 이것 또한 크기의 제약과 함께 이음새 부분의 어색함으로 인하여 다른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다.
그 후에 정물화를 그리게 되었을 때 정물 밑에 캠퍼스 천을 깔아 두었었다. 마침 그림을 그릴 캠퍼스도 아직 젯소 칠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내가 그릴 대상과 내가 대상을 표현할 캠퍼스의 “질감은 같다”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으며 가장 큰 차이점은 빛에 의한 명함 차이였다. 그래서 생 캔퍼스 천에 명함을 입히게 되었는데 부드러운 명함처리가 붓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스프레이로 명함을 표현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그러한 재료기법으로 작업한 첫 그림이다. 오브제로는 실제의 옷감과 나무결을 얇게 썬 무늬목을 재료로 택하였다. 이러한 표현방식은 실제 사물을 이용함 으로서 대상의 재현을 전제로 한 환영이 아닌 새로운 극 사실주의 혹은 새로운 절대적 객관화에 다가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러한 실재 사물을 작품 이미지의 형성의 한 요소로써 배치를 한다면 표현할 대상과 내가 사용할 재료의 동일성으로 인해 내가 추구하는 작품세계에 한층 더 다가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러한 재료기법의 사용에 있어서 유물론적 의의도 작품에 담을 수 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untitle, 80x100cm, mixed media, 2008

Two desk, 120x90cm, mixed media, 2010 Untitle, 120x180cm, mixed media, 2010

2010년도의 첫번째 개인전에서는 오브제의 특징적 요소를 대상의 형태에 부합되는 작품위주로 전시를 하였다. 대상이 인물이면 그 인물이 입고 있는 옷을 보이는 것 그대로 표현하거나 책상도 보이는 그대로의 시점을 이용하여 최대한의 주관적인 작가주의를 최소화 하려 노력했다.

 

7. 작업개념에 대한 의문점의 도출

 

2. 3. 작업행위가 작품개념에 부합되지 못하는 문제점 作品的行为不符合作品概念的难点

하지만 이러한 표현법에 있어서 내가 추구로 하는 시점에 대한 양식에 부합되지 않는 두 가지 문제점이 드러났다.

 

2.3.1 시각의 한계

첫째로는 앞에서 밝혔듯이 베르그송의 “이미지” 에서 작가가 관찰하여 캠퍼스에 옮긴 요소, 즉 시각적으로 최대한 객관적으로 표현하였다고 하더라도 눈이라는 지각요소를 이용하여 망막에 맺힌 사물의 형태, 색깔, 질감, 등의 표현은 결과적으로 표현에 가장 접합한 손이라는 신체도구를 이용하여 결과물로 도출되는 것이다. 그 사물의 형태, 색깔, 질감 등의 요소들은 빛의 영역에서 관찰자의 망막에 맺힌 후 뇌의 신경세포로 전송 되어서 그곳에서 얽히고 설킨 시냅스에서 전기신호체계로 변환되어 근육 신호로 변환되는 과정을 거쳐서 비로서 손을 통하여서 결과물로 돌출되어 나온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로 인해 내가 표현한 결과물은 최대한 보편적으로 대상을 표현하려 하여도 사람마다 명확히 다른 구조적 뇌신경체계를 거쳐서 표현되어 나오는 지라 근본적으로 절대 객관적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2.3.2 대상과 작업 재료와의 불일치
두번째 문제점은 이러한 표현법에 있어서 대상을 보고 표현을 한다는 것이다. 내가 실제로 표현하려는 대상(웃을 입은 모델)을 보고 표현할 때 그 대상의 실체(천, 페브릭)를 직접 쓰지 않는 이상 그것은 대상(모델의 옷)과 표현된 작품(작품에서의 천)은 같은 이름으로 명명된 어떠한 사물이지 같은 존재이지는 않다. 는 것이다. 그 대상을 표현하는데 필요한 형태와 명암의 최대한의 객관적 옮김도 결과적으로 실재가 아닌 환영에 의거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작품 행위의 형태와 음영의 사용은 앞에서 밝혔듯이 뇌를 거치며 일련의 정보를 체계화하여 몇몇의 신호 체계로 바꾸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한 과정에서의 체계화는 절대적으로 나의 경험적 토대와 내재된 의식들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라서 내가 추구로 하는 절대적 객관화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8. 관념론에 대하여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도출된 문제점을 다시 짚어보았다. 거대 담론식으로 ‘예술은 무엇인가’를 논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나의 첫 표현(작업행위)의 출발 선상은 예술을 향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해 있었다. 게다가 앞서 밝혔듯 작업행위의 필연적 결과가 자의식의 현시라면 예술을 위한 “나”가 아니라 “나”를 위한 예술이 작업행위에 가장 타당하다고 느껴졌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어떠한 행위를 하였을 때 내가 진정 바라는 것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다시금 시작된 이러한 원론적인 나에 대한 물음은 진정 내가 원하는 어떠한 것이 내가 앞에서 밝힌 최대한 객관적으로 대상을 표현하여 대상이 가진 실존적 에너지를 중점으로 작품활동을 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작품의 결과물이 실존(실체)에 최대한 가깝게 표현하려는 이유에 대하여 되짚어 보기로 하였다.
앞서의 내용을 토대로 내가 추구하는 나의 작품에 대하여 얘기해 보자면, 그려질 대상이 나의 사고(생각들의 체계)에 투영되어 표현된 최종 결과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고라 함은 실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생각으로 체계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제 3자가 해석하기에 따라 혹은 시대에 따라 가변적으로 변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 변할 수 없고 항상 참 일 수 있는 절대 진리를 찾고자 하였다. 데카르트가 첫째로 찾은 절대 진리로서의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같은 절대 의심할 수 없는 절대 명제 같은 것이다. 그러한 절대적 명제를 작업행위의 출발선으로 삼아서 작품을 구상하고 고민한다면 작품에 대한 의구심을 애초에 차단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다. 그리하여 항상 그려질 대상의 본질, 혹은 절대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방법적 고민을 해왔던 것 같다. 그렇다면 다시 본질을 찾는 방법을 달리하여 생각해 보자.

 

1. 생각이 실체가 되어지는 방법에 대해서

하지만 그전에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생긴 몇 가지 의문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첫째, 눈 앞에 있는 사물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은 우리가 그 사물을 시각, 청각 미각, 촉각, 후각으로 인지하여 어떠한 관념(언어)으로 대입한 후 체계적으로 두뇌에 입력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이러한 대상이 지닌 성질을 구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의 의문점이 든다. 그것은 앞서 밝혔듯이 그 대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갖가지 정보를 습득하는 다섯 가지 오감에 대한 것이다. 대상이 지닌 성질들이 인간이 가진 오감으로서 인지할 수 있는 수준 넘어서도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이다.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은 종의 생물이 살고 그 종들이 지닌 인간이 인식 할 수 없는 수 없이 다양한 감각의 종류 (간단한 예를 들어서 개의 후각이나 박쥐의 초음파 등) 가 존재하는데 인간만이 사고(생각)의 고차원 성을 이유로 대상의 다양한 성질을 모두 이해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어서이다. 만약에 인간보다는 월등한 존재, 가령 지금까지 알려진 혹은 알려지지 않은 모든 인식 체계를 가진 존재가 있다면 어떠한 대상의 정보를 취득함에 있어서 인간보다는 훨씬 더 그 대상의 진정한 면모에 다가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둘째, 어떠한 것의 정의를 내리는데 필요한 인식 수준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라는 것이다. 생각이나 관념은 의식 체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지만 물질(실존)은 그것 그 자체고 그것을 정의하고 설명하는 것은 인간이다. 그 인간은 생각과 경험에 따라서 인지의 범위나 체계가 변할 수 있다. 그러한 생각과 경험이라는 것은 시간의 개념을 바탕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물질세계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의 실체를 이루는 물질은 내가 주위를 인식할 수 있는 충분한 생각과 경험을 갖추기 이전의 존재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이 지니는 성질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설수도 있는 가정이 생긴다. 간단한 예를 들어 기원전의 인간이 현재의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았다고 가정하여 보자. 그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비행의 원리 조차 개념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 비행기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실재 눈에 보이는 비행기의 몸통과 비행소리 같은 것 일 것이다. 의래 너무 놀란 나머지 전지전능한 자의 힘이라고 칭송하거나 혹은 그러한 이해 할 수 없는 요소들을 최대한 포용하면서 경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습득 요소 즉 비행기의 은빛 동체와 비행 중 공기를 진동시키는 소리 같은 정보를 가지고 최대한 설명해 보려고 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인간은 시대라는 시간적 개념을 통해 이룩할 수 있는 지식으로써 이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을 밝히고 그 구조적 체계를 밝히고 있다. 그렇게 이 세상을 이루는 모든 물질을 발견하고, 우주를 구성하는 체계를 밝히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근본적으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셋째, 본질은 기본적으로 언어로서 표현 을 하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은 근본적으로 언어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함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언어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인간의 활동 또는 행위로 인식한다. 언어란 기호의 체계로서 사용자인 인간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그 성격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용자인 인간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것이다. 즉 언어는 인간의 삶이라는 구체적인 현장에서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 그런데 그런 현장을 검증해 보면, 언어의 의미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문맥에 따라 다양한 형식으로 나타난다. 전통적으로 많은 철학적인 문제는 그러한 언어의 사용에 주목하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적 문제에 대한 올바른 접근은 일상 언어가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용법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명료화를 위해서 다양한 언어놀이 에 참여하면서 단어와 문장들의 의미가 어떻게 생겨나고 사용되는가의 문제에 직접 부딪혀 보아야 한다고 하고 있고 그런 활동이야말로 철학의 임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렇게 비트켄 슈타인은 언어의 본질을 밝힘에 있어서 언어와 언어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생태계에 주목했다.
비트켄슈타인은 본질을 찾는 과정에서도 흥미로운 제안을 한다. 그는 어떻게 더 본질에 다가갈 수 있을까 하는 것보다 본질을 바라보는 시각의 태도에 대해 얘기하였다. 비트켄슈타인은 “본질이 존재한다”보다 “본질의 존재 유무”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의미란 애초에 본질에 의존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본질이 존재해야 하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본질이 있든지 없든지 대상의 의미는 결정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상의 의미를 내리는 문제를 두고” 본질이 존재해야 하느냐”를 논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마찬가지로 본질이 존재하느냐를 따지는 것도 불필요한 일이다.

 

2. 5.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의 제고

요약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의 본질에 대한 핵심은 본질을 밝히는데 있어서 사용 되어지는 언어들의 핵심 의미를 바탕으로 서로간의 언어적 관계를 더욱 구체적으로 파악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상의 의미와 본질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본질을 밝히는 과정에서 필요한 핵심 논제에 대한 문제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다시 사물의 본질을 밝히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았다.

 

2. 6. 인간의 내적성향에 입각한 요소를 작품에 대입.

내가 어떠한 관념론적인 관점과 유물론적인 관점 중 하나를 선택하여 작업활동을 하는 것이 대상에 대한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까? 아니면 관념론과 유물론, 본질과 실존, 생각과 물질이라는 이 두 가지 상반된 속성을 지닌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잉태 되어지는 새로운 양식을 토대로 그 대상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까? 그렇게 본질에 다가가는 과정을 여러 각도로 접근하여 보기로 하였다.
먼저 관념론적인 관점에서 작품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다. 변할 수 있는 성질을 지닌 생각이나 취향 등을 작품에 대입에는 썩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인간의 보편적인 본능에 충실한 것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았다. 그러한 본능은 지금 내가 표현할 대상의 본질을 찾고 고민하고 하는 내적 기질 혹은 성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표현할 대상이 무엇인지 그것의 본질을 밝히는 나의 성향은 “일반성을 향한 갈망”같은 인간의 내적 본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설명을 하자면 인간은 여태껏 보지 못한 현상이나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것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일반화하려고 하는 내적 본능을 지니고 있다. 라는 것이다. 그러한 현상은 시각적인 면에서도 나타난다.

예를들어

“————————————————————————————–“

위 그림처럼 점선을 줄 지어서 종이 위에 그렸다고 가정하여 보자. 그림을 그린 당사자 외에 저 그림을 본 사람은 순간적으로 점선으로 이루어진 길게 늘려 놓은 집합체라는 생각보다 하나의 긴 선이라는 인지를 먼저 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형태주의 심리학자들은 자극들을 체계화하는 요소로 완결성이라 부른다. 더 쉽게 말하자면 무의식 속에서 굉장히 빠른 순간에 진행되는 시각적 요소들의 단순화이다. 형태주의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단순화 과정은 무의식적이고 순간적으로 수행되기 때문에 단순한 작업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고도의 해석 과정을 거친 결과라고 예기한다. 이러한 예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시각 요소 들을 쉽고 빠르게 뇌신경세포에서 처리하기 위해 일반화를 거쳐서 인지하게 된다.라는 이야기이다.

그러한 현상을 뇌 신경학적 측면으로 설명하여보자. 맹인과 정상인의 뇌 지도를 가지고 비교한 사례가 있다. 하버드 의대의 한 연구자는 TMS(경두개 자기 자극술 Transcranial Magnetic Stimulation)를 사용하여 맹인의 뇌와 정상인의 뇌를 비교하는 실험을 했다. 양자의 대뇌피질 지도를 비교해 보니, 맹인의 뇌 속에 있는 손가락을 담당하는 부위에서는 점자를 읽을 때 사용되는 뇌의 부위가 훨씬 더 커져 있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마크 로젠츠바이크 Mark Roserzweig의 쥐 실험에서도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을 뇌의 “가소성 plasticity” 이라고 한다. 뇌가 똑같은 자극을 계속하여 받았을 때 그 부위를 담당하는 뇌 부위가 활발해져서 그 자극을 인식하는 과정이 굉장히 빨라진다는 설명이다. 그것은 뇌가 복잡한 이해체계를 사용하여 인지하던 현상을 뇌의 구조를 바꾸면서까지 쉽고 빠르게 이해하기 위한 일반화 과정이라고도 해석될 수 있다.
그리하여 표현할 대상의 시각적 요소에서 찾을 수 있는 형태들의 최대한 일반화된 요소를 작품에 대입 하기로 하였다. 그러한 것들의 가장 근본이 되는 요소, 즉 점, 선, 면으로 구성된 기하학적 요소이다.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관념의 세계를 끌어들여서 눈으로 통해 지각된 요소들과 함께 작품에다가 배치하였다.
그러한 식으로 나를 규명할 수 있는 나의 내적 본능에 충실한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 후로 나라는 인간이 지닌 가장 원초적으로 바라는 요소들을 끄집어 내기 시작했다. 어느 장르나 개념, 대상, 작업 방법 같은 것에 구애 받지 않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내 일부 일수 있고 나의 전부일수도 있는 것들. 나라는 존재를 포괄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것이 지닌 것들을 여과 없이 무수히 밖으로 표현 하였다. 이러한 작업의 반복적인 행위로 인간일 수도 있고 그 안에 내재된 나일 수 있는 조각들을 만들어 내고 맞추어 나갔다.

예상대로 어떠한 기준이나 형식도 없이 나에게서 뿜어져 나온 이러한 작업의 결과물들에서 낯설지 않은 것들이 서로 겹쳐져서 표출 되었다. 이것들은 대다수가 살아오면서 체험하고 경험하여 머리에 저장된 것들의 파편들 이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작업 과정으로 인해 도출된 파편들을 풀어헤치고 재배치하여 재조립하며 겪은 일련의 과정을 주목하였다.

 

3. 결론
작업 초기에 내 작업개념의 중심은 관념론과 유물론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양자택일의 관점이었다. 이후에는 비트켄 슈타인이 제시한 본질을 밝히는 방법에 있어서의 관계적 관점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물론적인 사상과 관념론적인 두 사상을 한 작품 안에 배치하게 되었다. 그런식으로 작품을 작가와 작가가 표현한 대상과의 관계를 중점으로 두고 생각하여보면 작품이라 하는 것은 작가와 대상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서 도출된 실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과정의 지속으로 인한 생각과 사고 또는 개념들의 탄생성 이 내가 추구하는 작업행위의 순환고리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리하여 표현 하고자 하는 대상의 본질을 밝히려 끊임 없이 고민하는 나의 내적 열망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았다. 이러한 나의 내적 열망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어느 누구도 가지 않은 방법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으려고 하는 이러한 의지는 주의의 많은 곳에서도 일어나는 것 같다.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 그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능적 열망이다. 첫눈이 쌓인 아무도 밟지 않은 뒤뜰에 자신의 발자국을 처음으로 남기는 것과 아폴로 18호가 달에 남긴 인류의 첫 발자국이 사람에게 미치는 가장 커다란 영향은 첫 번째 라는 것이 가지는 특별함일 것이다. 그렇게 가보지 않은 산길을 처음 개척하는 산악인을 최고의 가치로 평가하듯이 사람은 가보지 않은 곳을 가는 자를 미덕으로 여긴다

우리는 눈 쌓인 언덕길을 썰매를 타고 내려올 때 마음대로 궤도를 정할 수 있다. 눈길에 숨어 있는 어떠한 변화도 감당할 수 있다. 그런데 두 번째 언덕길을 내려올 때는 처음에 갔던 썰매 자국을 따라 내려오는 것이 수월하기 때문에 웬만하면 그 길을 따라 내려온다. 그 다음, 그 다음도 마찬가지이다.” 일단 궤도나 신경회로나 놓인 뒤에도 우리가 그 경로에 벗어나거나 다른 경로로 넘어갈 수 있을까? 파스쿠알-레오네 (Alvaro Pascual-Leone) 는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렵다. 일단 만들어진 궤도는 정말 빠르게 너무나 쉽게 썰매를 언덕 아래로 유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경로를 선택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 진다.—도이지 (Edward Adelbert Doisy) 2008: 272-273

위의 글은 파스쿠알-레오네라는 신경과학자가 눈썰매를 경우로 들어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 왜 가치 있는지를 설명한 글이다. 그것은 익숙하지 않은 길을 갈 때의 위험을 감내할 수 있는 힘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 힘이라 함의 원천은 험난한 길을 가서 목표를 성취하였을 때 오는 보상의 기쁨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생겨난다. 그렇게 알아간다는 것, 호기심을 충족한다는 것,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 알지 못하는 것을 이해 했을 때의 기쁨을 깨닫는 것, 그러한 기쁨을 계속 쫓아 가는 열정을 복 돋는 것, 이러한 서로 연결되어 돌아가는 과정에서 도출되는 변화가 작품활동을 함에 있어서 필연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인간은 다시금 그러한 행위들에 의해서 인간성의 다원성을 축척해나간다.

이것과 저것 중에 최선의 선택을 하여서 결론을 내리는 결과론적 가치보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변화해가는 “과정이라는 가치”가 최선의 선택을 한 “결과론적 가치”보다 더 가치 있다. 라는 것. 내적 열망의 구체적 체계화를 통한 자의식을 드러내는 행위가 변화를 수반 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리고 기존의 통념을 부정하고 나만의 시각으로 끊임없이 의문을 가지고 해답을 찾고 다시 문제점을 발견하고 해결점을 찾는 변증법적 과정의 가치. 그리고 이러한 자기를 드러내는 모든 행위가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인간성을 이끌어 낼 수 있음을 작품활동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Hannah Arendt , 이진우 역, 한길 그레이트 북스, 2002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헤겔예술철학> 한동원 외 역, 미술문화 2008

Valis Deux, <그림으로 이해하는 현대사상> 남도현 역, 개마고원 2002

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 논리 철학 논고> 이영철 역, 책세상, 2006

고병권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린비, 2003

석영중, <뇌를 훔친 소설가>, 예담, 2011

2013 중앙 미술 학원 벽화과 작품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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